홀가분해지지 못했습니다.
올 시즌 페넌트 레이스의 마지막 경기를 두 눈으로 직접 본다는 미명 아래, 가을 잔치에 대한 일말의 집착을 숨기지 못하고 야구장에 앉아있었습니다. 저는 혹사를 싫어한다지만 겨우 그 정도의 팬입니다.

이상화가 강판될 때부터 전 부루퉁했습니다.
투수 코치에게 공을 건네주는 태도가 전혀 불퉁하지 않고 담담한 이상화가 못내 안타까웠습니다. 당신은 어쩌다가 바보같이 그런 것에 초연해진 겁니까.

일찍 내려가는 것보다 그의 그런 모습이 참 싫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까지 이상화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해야 하는 타이거즈가 싫었습니다. 투수는 섬세한 족속이라잖아요. 왜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나요?

우리에겐 중요한 경기지만 중계는 없습니다. 자력으로 4강 진출을 할 것인지가 결정되는, 시즌 마지막 중요한 경기를 어떻게든 보기 위해 구름관중이 모였습니다. 운동장 앞 암표 아줌마는 족발 등을 사야 암표도 판다고 이야기를 할 정도로. 불과 어제까지도 없던 일입니다. 90년대까지나 있었을법한 일들. 팬들의 관심은 그렇게나 뜨거웠습니다. 그렇게 기대감이 몽글몽글 모여있는 가운데 맞아나가는 타구가 번번히 워닝 트랙에서 잡히는 건 불안한 일이었겠지요. 마운드를 내려오는 이상화에게 쏟아지는 갈채와 그를 토닥여주는 동료들의 손길이 왠지 비현실적으로 느껴졌습니다.

윤석민은 구속이 줄어들었습니다.
그의 140은 슬라이더인 줄 알았습니다. 아니더랍니다. 얼마전까지 150을 던지던 녀석인데 말입니다. 구속이 전부는 아니니 공의 체감을 이야기하지요. 맞으면 그대로 넘어갈만큼 가볍습니다.

윤석민이 먼저 올라왔다는 건 다행히도 신용운이 올라오지 않는다는 이야기였습니다.
하기야 그는 어제 6이닝을 던졌습니다. 한 경기에서만 던진 것도 아니고 몇 시간의 텀을 두고 두 경기를 뛰었지요. 일찌감치 빨간 겉옷을 껴입고 불펜에서 몸을 푸는 투수들을 지켜주는 모습을 보니 그나마 나오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어 약간 안도했습니다. 그나마 그가 또 나오지 않는 것도 얼마나 다행인가요.

이렇게 하나가 덜 혹사 당한다는 것에 안심을 하는 것도 참 못된 마음입니다. 윤석민의 허전한 얼굴 표정은 무엇으로도 보상할 수 없는데 말입니다. 내가 앉은 자리에서는 그의 얼굴을 볼 수는 없지만 캠코더의 16x 줌은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올 시즌 40경기 넘게 현장에서 본 언니는 그런 얼굴을 하는 윤석민은 처음 봤답니다.
미안해, 신용운이나 한기주만큼 널 좋아하지 못해서 정말정말 미안해. 그치만 어깨를 늘어뜨리는 모습은 보기 힘들더라.

한 점은 어렵게 얻어도 한 점은 쉽게 내주는 것이 약팀의 모습입니다.
더블 헤더에서도 쉴 수 없는 팀 사정에 지친 김상훈을 원망할 수도 없고 타자 앞에서 불규칙 바운드가 되는 맥없는 공을 던진 윤석민을 원망할 수도 없습니다. 뒷자리에선 포수 쟤 뭐야 하고 새된 목소리로 불만이 터져나왔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란 건 그 아가씨도 저도 잘 알았습니다. 김상훈은 타석에서라도 만회하려고 열심히 뛰었지만 마음처럼 몸이 따라주지는 않는 것 같더군요.

8회에 한기주가 올라오는데 말입니다.
광주에서 야구를 보는 건 요 근래의 일인데, 그 아이의 자리가 얼마나 커져있는지를 느낄 수 있습니다. 제겐 그냥 못하면 까이고 한없이 속상하게 만들던 한기주일 뿐인데 홈 팬들에겐 그렇지 않았어요. 올라오면 막아낼 것이라는 신뢰감을 주는 투수 한기주입니다. 나름대로 팬이라고 자부해오며 꼭 잘할 거라고 믿었지만 언제 이렇게 되었는지 어리벙벙합니다. 더블 헤더 2차전에서 기주가 마운드에서 내려갈 때 '내일도 나올라면 힘내야제~' 정도의 믿음 없이는 나올 수 없는 외침까지 나왔죠. (일요일 두 경기 다 나오고 월요일에 또 나오는건 혹사라는 걸 알아도 그게 당연할 거라는 것 또한 알고 있으니 그렇게 외친 아저씨께 화가 나지는 않았습니다. 한기주는 너무 잘 합니다.) 구속은 눈에 띄게 줄었지만 어쨌거나 잘하고 있었습니다.

결정적으로 그 녀석이 팬들에게 차지하고 있는 위상을 느낀 게, 경기가 끝나고 응원단장 아저씨가 기주에게 마이크를 건넸을 때인데요. 뭐라고 멘트를 짤막하게 하니 우레와 같은 탄성이 터져나왔습니다. 객석에 사인볼을 던질 때 김진우도 나름대로 멘트를 했는데 팬들의 환호의 크기가 한기주와 비교되지 않더군요. 자업자득이겠지만 누가 더 사랑을 받는지 극명하게 보여주는 예였습니다.
몰랐는데 한기주가 지금 타이거즈의 에이스입니다.
전 그저 김진우가 팀의 에이스로 나서고 한기주는 형님들이 씌워주는 우산 아래서 차근차근 성장하길 바랐을 뿐인데 말이에요. 자칭 팬이라면서도 기대치가 너무 보잘 것 없었나, 혹은 선수를 전혀 볼 줄 몰랐나 생각이 들었습니다.

경기 후반 종범성이 천금같은 찬스를 날려먹었지만 그의 타석에 모두가 보내던 그 성원은 어마어마했습니다.
저는 그게 신앙이라고 이야기를 했고, 같이 본 모 언니는 집착이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둘다 맞을 겁니다. 어쨌거나 전율이 일어날 상황이지만 정황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이성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을 장면이겠지요.
이용규도 이쁜 짓만 골라하면서 잘 하고 있다지만 앞으로 이런 정도의 성원을 불러일으키는 선수가 이종범 외에 몇이나 나올까나요. 정말 그는 레전드입니다.

내내 시큰둥해 있었으면서도 10회 김원섭의 끝내기 안타가 터져나왔을 땐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뭡니까, 이 남자. 지병도 있고 연일 나와서 몸이 많이 안 좋을텐데. 어제도 몸 바스라지도록 뛰겠습니다 하더니 결국 해내더군요. 한번 입에서 나온 말은 허투루 뱉는 법이 없는 실속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에게 칠 기회가 조금은 더 주어졌어도 잘했을텐데 두 번이나 번트를 지시한 감독이 원망스러웠습니다. 기대를 내심 했지만 1군에서 어떻게든 자리가 생길거라고만 했지 붙박이 주전급의 단단한 자리를 구축해가며 고비 때마다 잘해주는 정도가 될 줄은 몰랐습니다. 그저 고맙습니다.

극적인 승리 이후 선수들은 떠들썩했고 폭죽이 연신 터졌습니다.
종범성이 찬스를 날리고 꽤 많은 관중이 빠져나갔지만 야구장에는 여전히 수천의 관중이 남아서 선수들과 기쁨을 함께 했습니다.
먼데서도 김상훈이 좋아하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폭투를 블로킹하지 못해서 한 점을 내주었다는 마음의 부담을 덜은 것 같아서 다행스러웠습니다.

후에 언니가 찍은 영상을 돌려서보다가 알게된건데, 그때 신용운이 한기주를 뒤에서 한 팔로 꼭 안아줬습니다. 윤석민도 애정어린 손길로 토닥여줬고요. 자기도 고생 많이 했으면서 한기주, 윤석민 두 후배가 고생 많이 했다고 챙기는 것 같아보였습니다. 이후엔 한기주가 팬들에게 감사하다는 플래카드를 들고 있는 맨 앞줄에 서도록 떠밀어줬더군요. 그래야 한기주가 스포트 라이트를 받을테니까요.
마음 씀씀이까지 아름다워 좋아한다는 걸 행복하게 만들 줄 아는 사람이라서 신용운이 더욱 좋습니다. 부디 신군을 오래오래 응원할 수 있길.

이겼어도 찜찜한 경기였습니다.
신용운은 나오지 않았지만 윤석민, 한기주는 여전히 연투를 하며 예전만 못한 구위를 보였습니다. 다른 곳에서 아름다움과 이기심을 이야기했지만(살을 붙여서 블로그에 올리려고 했는데 맘대로 안되는 상황입니다-ㅅ-) 경기를 보는 내내 저야말로 아름다움과 이기심 사이에서 많은 갈등을 했습니다. 해답을 얻었냐고 모두에게 물었지만 저도 아직 얻지 못한 것 같습니다. 간극은 있다고 했지만 '승리는 좋은 것이다'와 '모두가 좋아하지 않으니 혹사는 나쁜 것이다' 둘다 맞는 명제니까요.

어린 투수들이 나오고 또 나오는 정황이 밉고 또 밉지만 어느새 저는 준플레이오프 일정을 헤아리고 있습니다. 대전 원정은 힘들더라도 2차전은 갈 것 같습니다.




블로그는 곧 다시 열겠습니다.
2006/10/03 03:05 2006/10/03 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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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민규君 2006/10/04 01:12

    돌아오셨군요^^ 추석 잘 쇠시길.
    전 1차전 갈지 안갈지...(일단 대전으로 토 or 일 언제 내려갈지 자체가 미정이라;;)
    p.s. 그래도 기아는 3~7일 5일을 쉬네요;; 한화는 우천취소경기 한답시고(-_-)
    5일 경기뒤 6,7일 2일밖에 못쉬니;;
    MLB처럼 경기해도 모든 팀의 순위가 안바뀌면 남은경기 취소하면 안되나;;

  2. 박준완 2006/10/04 08:17

    오셨군요.
    저도 야구장에 있었는데...
    연락을 주시지...^^
    야구 끝나고 일행과 늦은 저녁을 먹으면서 이렇게 욕하고 뭐라고 하면서도 막상 추석 차례와 성묘가 끝나면 준플 일정을 헤아리며 어떻게 하면 야구장에 갈 수 있는지를 고민하고 있을 우리들이라면서 우스개 소리를 했던게 기억에 납니다.
    야구라는 마약에 중독이 되어서 야구장에서는 내내 불만 가득한 얼굴로 일행과 군시렁 거리면서 야구를 보면서 정말 이팀을 왜 응원해야 하나 한심스러워 하면서도 막상 야구가 있는 날이면 야구장에 가지 못해 안절부절 하는 저를 보면서 가벼운 웃음이 나오네요.
    준플이 6시 시작이어서 9일에 야구장에 있을지 중계를 보게될지 장담을 못하겠네요.
    즐거운 추석명절 보내세요.

  3. 잿빛하늘 2006/10/04 15:49

    컴백 방가방가~ 플옵과 관계없는 팀은 이럴때 일정 걱정 안해도 되고..(우하하하하 -_-)
    아, 추석 잘 쇠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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